
빅블러 2.0: AI는 어떻게 산업의 경계를 파괴하고 있는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배달 앱은 음식점을, AI 프로필은 사진관을 대체하는 수준의 변화를 상상했다. 하지만 최근의 움직임은 그 차원을 달리한다. "축구 관람 파-티 준비"라는 한마디에 칩과 음료는 물론 TV까지 추천하는 유통 플랫폼 , 고객의 투자 자문을 수행하는 AI 뱅커 , 8개의 부품을 단 하나로 통합해 무게는 40% 줄이고 강도는 20% 높인 자동차 시트 브래킷. 이들은 산업과 서비스의 경계가 흐려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생성형 AI라는 새로운 엔진을 만나 ‘빅블러 2.0’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빅블러 1.0: 플랫폼이 설계한 새로운 시장 규칙

빅블러 2.0의 파괴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10년간 모바일과 플랫폼이 주도했던 ‘빅블러 1.0’이 구축한 토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비즈니스의 근본적인 규칙을 재정의했다.
소비자는 단순 구매자에서 기업 활동에 참여하는 ‘핵심 활동가(Key Activist)’로 격상됐고 , 기업의 관심사는 일회성 ‘거래(Transaction)’에서 고객과의 ‘지속적 관계(Relationship)’로 이동했다. 시장의 후발주자는 기존 시장을 따라가는 대신, 스스로 시장을 ‘재정의(Redefine)’하며 차별화된 가치를 만들어야 생존할 수 있었다. IT 기술로 금융의 문턱을 낮춘 카카오뱅크 , 택배와 금융을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거점이 된 편의점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산업의 경계를 ‘초월(Transcendence)’하는 것이 기본값이 됐고 , 경쟁의 단위는 개별 기업에서 파트너십을 포함하는 ‘생태계(Ecosystem)’ 간의 대결로 확장됐다.
빅블러 2.0: ‘생성’이 가치사슬을 재편하다

빅블러 1.0이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의 답을 ‘추천’하는 시대였다면, 빅블러 2.0은 생성형 AI를 통해 고객의 요구에 맞춰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시대다. 이는 단순히 기술의 진보를 넘어, 산업의 가치사슬(Value Chain) 자체를 재편하는 더 근본적이고 파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프랑스 까르푸의 AI 어시스턴트 ‘홉라(Hopla)’는 고객의 예산과 식단에 맞춰 장바구니를 구성하고 레시피를 제안하며 식료품점을 영양사이자 요리사의 경계로 이끈다. 신한은행과 KB국민은행의 ‘AI 뱅커’는 PB의 전유물이던 고도의 자산 관리 서비스를 대중화하며 셀프서비스 앱과 전문 컨설턴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GM의 생성형 디자인은 인간의 상상력과 기계의 생산성,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경계를 허물었고 , AI 글쓰기 서비스 ‘뤼튼(Wrtn)’은 광고 문구부터 사업계획서까지 작성하며 AI가 단순한 툴을 넘어 창작의 플랫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AI 시대의 인재상: ‘에셸론(Echelon) 모델’을 제안하다

AI가 인간의 기능적(functional) 역할을 빠르게 대체하는 상황에서, 개인과 조직은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하는가? 나는 그 해답으로 전문성의 ‘깊이’와 ‘수직적 통합력’을 강조하는 ‘에셸론(Echelon) 인재 모델’을 제안한다.
에셸론 모델은 세 가지 층위의 전문성으로 구성된다. 상단부는 ‘넓고 얕은 이해’의 층으로, 트렌드와 시장 동향을 읽는 안테나에 해당한다. 중단부는 ‘실무형 전문성’의 층으로, 특정 AI 툴 활용이나 데이터 분석 같은 실질적 스킬을 의미한다. 하단부는 ‘깊은 핵심 전문성’의 층으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철학과 창의성이 담긴 영역이다.
하지만 이 모델의 핵심은 세 개의 가로축을 관통하는 ‘수직적 통합력(Vertical Integration)’에 있다. 이는 기획, 조율, 리더십을 아우르는 ‘PD(Program Director)형 역량’과 같다. 즉, AI에게 ‘어떻게(How)’를 맡기고, 인간은 ‘무엇을(What), 왜(Why)’ 할 것인지 정의하고 질문하는 능력이다.

세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이며 이는 곧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래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하는 ‘자율 AI 에이전트’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AI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전략가’이자 ‘감독자’로 진화해야만 한다. 이제 개인과 조직은 "어느 회사(산업)에 속할 것인가"라는 낡은 질문을 버리고, "AI라는 강력한 팀원과 함께 나의 역량을 어떻게 통합하여 세상에 어떤 가치를 보여주는 PD가 될 것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에 답해야 할 때다. 가장 큰 경계는 우리 내부에 있을지 모른다.
본 칼럼은 최근 청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경계가 사라진 시대, 왜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가?’ 강연의 핵심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에셸론 인재 모델’ 등 주요 개념에 대한 시각적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발표 자료를 함께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