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통 전문지로 대형마트, 백화점, 편의점 등 국내 주요 유통업체 임직원이 구독하고 있는 리테일매거진에서 4월에 빅블러 특집으로 기사를 준비중이라고 연락이 와서 서면으로 인터뷰 한 내용입니다. 실제로 매거진에는 지면상 일부 내용만 들어갔지만 전체적인 특집 기획의 틀을 잡는데 도움이 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 2013년 책 <당신이 알던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이하 책)을 저술하신 후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빅블러 시대를 예견하셨던 입장에서 지난 10년간 이뤄진 산업간 융화를 어떻게 바라보셨는지 궁금합니다.
- 책 집필 당시는 경계융화 현상을 의미하는 빅블러가 드문 드문 파편화된 모습으로 다가오던 시기였고 대부분의 산업내 리더에게 예외적인 현상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면 10년이 지난 현재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의 촉매 중에 관련된 것을 꼽으라면 풍부한 글로벌 유동성에 순풍을 받은 스타트업 열풍, 비트코인으로 통칭되는 디지털자산의 등장, 새롭고 특이한 경험에 열광하는 MZ세대의 부상, 코로나 인한 비대면 기반 디지털 서비스의 전세대적 수용, 최근에는 생성형 AI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 국내의 경우 외식 트렌드 변화 4대 키워드(2018년), 금융위원회의 규제 감독 혁신의 당위성 (2019년)을 설명하기 위한 용도로 본격적으로 빅블러에 언급이 늘어나면서 외식과 금융권을 중심으로 빅블러에 대한 논의가 퍼져가면서 특히 2020년을 기점으로 건설, 게임, 푸드, 에너지, 유통 분야등으로 대폭 확산된 것을 흥미롭게 지켜봐 왔습니다.
- 이미 많이 알려진 사례이지만 편의점에서 우체국, 사물함, 스타일러 기능을 들여놓거나 설빙에서 짜장면을 팔고, 교촌에서 햄버거를 파는 것, 밀가루 제조사에서 맥주를 제조해 파는 것도 경계를 넘어선 시도를 지지하고 열광하는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집의 용도가 재정의되면서 홈트레이닝, 홈오피스, 홈씨어터등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2. 동아비즈니스리뷰 칼럼 <빅블러 시대엔 상상력이 혁신 동력>에서 ‘경계가 사라지는 융화는 결과적으로 융합 자체를 용이하게 만든다’고 하셨는데요. 융합과 융화는 어떤 성격의 관계인지 설명해주세요.
- 융합은 영어로 컨버전스(Convergence)라고 해서 2000년대 전후로 유행했던 용어로 주로 신기술을 기존 산업에 도입하거나 이종 산업간의 교차점을 찾아서 새로운 유형의 제품.서비스를 창출해 내기 위한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기술과 기존 산업, 또는 두개의 다른 산업을 살펴보고 융합의 결과물을 만들어 가는 의도가 배경에 있습니다.
- 융화의 경우는 굳이 영어로 한다면 디졸루션(Dissolution)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산업/업종간에 그동안 당연시 되었던 굵은 선들이 희미해지고 사라진다는 의미로 이제는 더이상 특정 산업/업종내에 있다고 해서 과거의 통념에 비추어 기대되던 고유한 역할 범위내에 더 이상 안주할 수 없고 경쟁 역시 이제는 산업/업종을 넘어서 발생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경계)융화를 메가트렌드로 인식하고 정의한 빅블러는 여러 기저의 변화들이 이러한 경계의 사라짐을 촉진하고 한쪽 경계가 사라지면 인근의 또 다른 경계 역시 희미해지는 피드백 구조를 가지게 되므로 융합처럼 결과를 내기 위한 의도보다는 특정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끄는 흐름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 정리하면 융합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아이를 낳는 것에 비유한다면 융화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공통점을 보고 닮아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3. 책에서 ‘기저의 변화’ 요인으로 짚으셨던 ‘기술’, ‘금융’, ‘고령화’, ‘환경’, ‘에너지’, ‘국제 패권’, ‘경기 침체’, ‘개인화’ 등이 실제로 각종 산업에 경계 융화를 가져왔습니다. 현재로서는 어떠한 기술적·사회적 요인이 빅블러를 촉진시키고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 소비자 측면에서는 가치와 취향을 중요시하고 생산자 측면에서는 저렴하고 효과적인 도구로 인해 새로운 시도가 용이해진 부분, 더 나아가 원한다면 글로벌 소비자에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유통망, 결제망에 접근이 가능하게 하는 요인들은 모두 빅블러를 촉진한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면에서는 핀테크, 메타버스, 블록체인, 구독경제, ESG, 크라우드펀딩, 인공지능, 친환경/기후변화, 신재생 에너지 등 다양한 영역의 발전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빅블러를 촉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특히 낯설고 새로운 것에 반응하고 서로 공유하는 젊은 세대의 숏폼 중심의 확산 문화, 생성형 AI로 인한 콘텐츠 및 지식 생산자도구의 확보와 대량 개인화(Mass Personalization), 실체화 된 자산을 디지털자산으로 전환하고 소유권 분배 및 유통하는 NFT 기반 토큰 경제 등도 눈에 띄는 촉진자로 볼 수 있습니다.
4. 책에서 ‘새로운 접점’으로 제안하셨던 ‘프로슈머’, ‘중고거래’ 등은 현재 보편적 비즈니스 개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향후 비즈니스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접점은 무엇이라고 예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프로슈머나 중고거래등이 책을 쓰던 당시에도 전혀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으나 소비자와 생산자간의 경계의 사라짐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제시했었습니다. 소비자가 수동적이면서 거래의 대상으로 제한적 역할을 하던 데서 제품 서비스를 기획, 개선, 홍보하는 등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주체로 이미 상당히 변화했다고 보이며 기업 또한 브랜드 정체성 기반으로 고객과 소통하고 진정성을 증명하는 식으로 성숙되어 가고 있습니다.
- 책을 쓰던 당시 소규모 팀으로 시작한 스타트업과 일반 대기업은 서로 너무 달라서 교류할 것이 없다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오픈이노베이션을 기치로 대기업도 작은 기업을 배우고 투자나 사업 측면에서 협력할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상화된 것도 큰 변화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저렴한 생산 도구, 우수한 인재, 풍부한 시장의 투자금, 실리콘밸리식 성장방정식이 많은 스타트업들을 업계 리더도 만들었고 이제 작은 기업들도 큰 기업과 경쟁할 수 있고 대등한 파트너 관계로 갈 수 있다는 점이 많이 바뀐 부분입니다.
- 향후 비즈니스 혁신이 가능한 영역은 상상력으로 열려 있는 부분이라 콕 집어 이야기 드리긴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바이오, 인공지능/로봇, 신재생 에너지, 이동체(차,비행기등), 식품 농업/재배업 분야에 기회가 많아 보입니다.
5. 본지는 신흥 이커머스 기업과 전통적인 오프라인 소매업에 종사하는 임직원이 모두 구독하고 있는 유통 전문지입니다. 양 업계는 각자의 강점을 기반으로 상호간 시장 확장에 심혈을 기울이는 가운데 실제로 경계 융화가 일어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빅블러 시대 관점에서 유통업계 구독자들이 참고할 만한 팁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 아마 코로나 시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D2C(Direct to Customer) 열풍이 불어 기존에 입점 방식으로 유통하던 기업들이 직접 자사 온라인 판매 사이트와 직영점을 구축하고 고객관계를 직접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애플등이 앱추적금지가 가능하도록 사용자 선택권을 제공하면서 과거보다 D2C 위주로 사업을 하던 기업들의 광고효율과 고객유입이 감소하는 현상이 발생했고 고금리가 지속되고 소비가 부진해지는 경제상황속에서 직영점 운영의 기회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고정비용과 재고부담이라는 리스크도 보게 되었습니다. 업계의 트렌드는 이해하고 있어야 겠지만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보다는 잘 해석하고 자신이 속한 기업과 미래상황까지 고려하여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예를 들어 이미 잘 알려진 사례인 코닥과 후지필름의 경우에도 업계가 디지털 카메라 시장으로의 전환할 것이라는 추세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만 코닥은 파산하고 후지필름은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둘의 운명을 가른 분기점은 디지털 전환이 미치는 타업종으로부터 들어오는 경쟁심화와 업계마진의 대폭적인 감소 영향을 읽고 대처한 수준에 있습니다. 코닥은 이를 간과하고 단순히 트렌드에 자신의 몸을 맡겨 디지털 전문 카메라/필름 회사로 본인을 재정의하는 전문집중화의 길을 택했습니다. 반면 후지필름은 경영자부터 먼저 이러한 업계 변화의 장기적 영향을 정확히 읽어내고 회사가 가지고 있는 막대한 기술 역량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타 분야인 화장품, 제약, 디스플레이 등 성장 시장을 탐색하고 적극적인 M&A등을 통해 빠르게 진출하는 식으로 관련 다각화 기반의 양손잡이 경영을 펼쳐서 살아남았고 더 강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 그래서 트렌드 자체보다 트렌드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트렌드의 배경 이유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이해한 이후에는 업계에 머물던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경계를 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해외 메이저 정유회사 중에 전기차 충전사업이나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하는 곳들이 있는 것도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에는 외부를 향한 상상력 기반의 탐색도 필요하고 동시에 기업이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내부를 향한 자기탐색 또한 동반되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이러한 과정을 촉진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과거 이성적 논리가 우선되던 시대에는 왜 그렇지?(why so),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지?(so what),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지?(how can you do) 가 촉진 질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상상력과 가치, 도전이 중요한 빅블러 시대에는 다음의 질문이 더 필요합니다. 안될 거 없잖아?(why not), 의미/가치가 뭘까?(what’s meaning/value of),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할 수 있을까?(how might we)
- 자세한 내용은 해당 매거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